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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기쁨교회
주님의기쁨교회 / Joy Riverse Church / 1540 W. Linden St. Riverse CA 92507 / TEL: 951-686-4900 / FAX: 951-686-4901 / [email protected]
Source: jrchurch.org
Date Published: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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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을 헐라! (리버사이드 교회 소개) – 아멘넷
리버사이드교회는 장로교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컬럼비아대학, 유니온신학교, 유대교신학교,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더불어 서있다. 이 지역은 미국 …
Source: www.usaamen.net
Date Published: 6/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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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사이드교회(RKSDA) 4+ – App Store
Read reviews, compare customer ratings, see screenshots, and learn more about 리버사이드교회(RKSDA). Download 리버사이드교회(RKSDA) and …
Source: apps.apple.com
Date Published: 8/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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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리버 사이드 교회
- Author: 리버사이드 SDA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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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최초 공개일: 2022. 10.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lWutJLMzFs
[뉴욕 여행] 리버사이드 교회 Riverside church, 록펠러가문이 후원하는 초교파 교회 : 네이버 블로그
뉴욕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일요일.
예배도 드리고 관광도 할 겸, 지휘자님이 추천해주신 리버사이드 교회를 찾아갔다.
리버사이드 교회는 진보적 성향으로 많이 알려진 곳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님도 여러번 설교하러 오셨고 넬슨 만델라가 미국에 왔을 때 첫 주일날 이곳에 들러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고딕양식의 으리으리한 건물만 보면 진보적 성향과는 거리가 멀것 같으나 전혀 반대이다. 그리고 이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은 록펠러 가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호선 콜롬비아대학 정류장에서 내려 몇블럭만 내려가면 바로 리버사이드 교회! 일요일 오전 10시 45분에 메인예배가 있다. 10시 반쯤 콜롬비아대학 정류장을 나와 걷다보면 나처럼 예배드리러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교회 후문?으로 들어가서 한층만 올라가면 엄청난 예배당을 맞이하게 된다. 유럽의 수많은 성당들 만큼이나 화려하고 건물규모도 엄청나다.
The Riverside Church 미국 New York Manhattan 미국 New York Manhattan
예배가 끝나고 2층 발코니로 가면 교회 투어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 할 수 있다. 삼십명 정도의 참가자 중 스무명 이상이 뉴요커ㅋㅋ나를 포함 딱 두명만이 아시아인. 이건 분명 유럽의 고딕양식인데…교회는 진보적인 성향이라니. 왠지 느낌상 진보적인 교회면 건물도 상당히 현대적인 스타일이어야만 할 것 같은데 이 또한 나의 편견인가. 사실 예배형식이나 말씀이 엄청 새롭다 진보적이다 이런 느낌은 잘 모르겠는데, 여자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성도의 절반 이상이 아프리칸어메리칸이라는 점이 낯설면서도 새로웠달까. 나는 흥겹게 신나게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분위기를 예상하며 왔는데, 완전 빗나간 나의 예상ㅋㅋㅋ조용하면서 경건한, 그러나 온기넘치는 예배. 주님의 평화를 옆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성도분들이 나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도 일일이 찾아와 악수하며 The peace of the Lord be with you를 말해주고 간다. 살짝 놀랐으나 당황하지 않고!ㅋㅋㅋ예배가 끝나고 2층 발코니로 가면 교회 투어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 할 수 있다. 삼십명 정도의 참가자 중 스무명 이상이 뉴요커ㅋㅋ나를 포함 딱 두명만이 아시아인.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누고 투어를 진행하는 자원봉사자분이 리버사이드 교회의 역사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 원래 리버사이드는 지금 위치에 있지 않았고 새로 지으면서 록펠러가 기증한 사유지인 이곳에 짓게 되었단다. 그리고 건축가들을 유럽에서 초빙하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나 종탑의 종들은 유럽에서 만들어서 들여왔다고 한다. 역시 록펠러가 기부해서 지어진 교회는 스케일이 다르네…나아가 이 건물은 스틸로 지어졌기 때문에 튼튼함은 물론이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고 한다. 투어 가이드분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교회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유명한건 다들 알고 계실 거에요. 건물도 그만큼이나 진보적인 기술로 지어졌죠!” 실제로 뉴욕에 강추위가 몰아친 날이었는데, 건물 난방 없이도 오리털 패딩이 더워 땀 삐질 흘릴뻔.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1층 예배당으로 다시 총총. 예배당 맨 앞쪽에 앉아 고개를 돌려 2층 쪽을 바라보면 엄청 큰 황금 예수상을 볼 수 있다. 처음 교회를 지을땐 없었던 조각품인데, 후에 어떤 유명한 분이 교회에 기증했다고 하셨나;; 아…딸리는 영어ㅠ 예배당 앞쪽에 있는 오르간과 뒤편 꼭대기 층에 위치한 오르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음향효과가 엄청나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회에서는 음악예배나 콘서트행사가 종종 열린다. 참고로 다음주 1월 18일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 음악예배가 4시에 있단다.
이 교회는 최대 사천명까지 수용가능한데, 넬슨 만델라가 방문했던 날은 교회가 과포화 됐었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신 가이드님! 예배당 앞쪽에는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수많은 부조들이 있는데, 크게 5가지 주제로 나뉜다. 5가지 밖에 안되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가운데는 humanitarian, 오른쪽 끝은 art였던 듯… 그래서 가운데 부조의 중심에는 예수님상이, 왼쪽에는 링컨상이 있다. 나머지 얼굴은 잘 모르겠다…
교회 양쪽 복도에는 매우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들이 있고, 저마다 고유 주제를 가지고 있다. 교회 양쪽 복도에는 매우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들이 있고, 저마다 고유 주제를 가지고 있다.
가이드님 왈 왼쪽에서 세번째, 오른쪽에서는 두번째와 맨 마지막 스테인드 글라스가 주목해서 볼 만한 아이들이라며 간략히 설명해주심.
왼쪽에서 세번째는 구전으로만 존재하는 말씀이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책이 되기까지의 과정.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다양한 음악과 악기들인데
스테인드 글라스가 예전에 만들어져 재즈나 힙합이 없다고 가이드님이 아쉬워하심ㅋㅋㅋ
마지막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그림을 보아하니 신구약 내용을 축소한 듯 하다.
1층 메인 예배당을 다 보고 나면, 이 교회 건물 탄생의 최대 공헌자인 록펠러의 이름이 새겨진 벽면을 마주하며
옆에 있는 미니 예배당 채플로 이동한다.
결혼식장으로도 종종 쓰인다는 이 채플은 정말 아담하면서도 신전같이 신비로운 느낌이 있다.
이집트 신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신것 같은데…아무튼 예쁘다ㅋㅋ
메인 예배당이 있는 건물은 유치원과 공연장이 있는 옆 건물과 이어져있다. 근래에 교회 재건축으로 말이 많았는데는 교회는 크고 멋진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역사회에 어떤방식으로 이바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지어져하는 것 같다.
부속건물 1층 로비에서는 예배가 끝난 후 저렴한 가격의 점심식사가 제공된다. 로비를 지나 엘레베이터쪽으로 이동하면 교회건물 모형과 자판기를 발견. 사실 자판기 있던 위치는 전화기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인 일핸드폰이 요즘 공중전화는 필요 없으니 자판기로 대체. 재미난 점은 자판기쪽 기둥에 전화기를 든 사람들이 나란히 새겨져있다ㅋㅋ건축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조각! 우리에게 이 조각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즐겁게 마무리해주시는 가이드님. 역시 뭐든 알아야 보인다. 이 귀엽고 재기발랄한 조각을 놓칠뻔했어!ㅋㅋ
뉴욕의 비밀 100 #29 리버사이드 교회 종탑(鐘塔)과 전망대 투어
Secrets of New York 100 <29> 리버사이드 교회 종탑(鐘塔)과 전망대 투어
‘맨해튼 록펠러 교회’ 꼭대기에 오르면…
74개 종 연주 카리용과 뉴욕/뉴저지 360도 전망
Rivershide Church, NYC
한때 뉴욕의 등대는 맨해튼 미드타운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250피트)였다. 2022년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변화무쌍하다. 로어맨해튼은 원월드트레이드센터(1776피트)가 위용을 자랑하며, 억만장자의 길(Billionnaires’ Row)로 불리우는 센트럴파크사우스 57스트릿은 1천 피트가 넘는 럭셔리 콘도미니엄 빌딩이 경쟁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업타운 모닝사이드 하이츠는 1930년부터 여전히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가 부동의 자리를 지키며 허드슨강과 맨해튼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딕 양식의 리버사이드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교회 건물로 392피트(119m)에 달하는 첨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컬럼비아대학교와 그랜트장군 묘를 비롯, 59스트릿 미드타운의 럭셔리 콘도와 로어맨해튼의 원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스카이라인, 그리고 허드슨강과 조지워싱턴 브리지의 전망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Rivershide Church, NYC
리버사이드 교회 꼭대기(보통 건물의 약 60층)엔 전망대와 종탑(bell tower)이 자리해 있다. 종탑과 전망대 투어(Riverside Tower Tours)는 2001년 9/11 이후 보안을 위해 폐쇄됐다. 그로부터 근 20년만인 2020년 1월 투어가 재개됐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덮쳤다. 다시 교회 종탑은 2년여의 휴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근 다시 타워를 개방했다. 지난 24일 리버사이드 타워 투어에 참가했다. 안내자는 종탑 투어 후 최대의 인원(68명)이라고 했다.
*리버사이드 교회에 울려처진 종들의 합창, 2018
투어 그룹은 일단 기프트숍에서 안전책임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 그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발코니 올라가서 본당을 내려다본다. 발코니석은 늦은 이들을 위한 자리라고 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엔 비디오룸이 있다.) 우리가 투어한 날은 잉글리시 핸드벨 페스티벌(English Handbell Festival)로 핸드벨 콘서트 리허설 중이었다. 종탑 21개층엔 강의실 80개와 사무실 등이 자리해 있다. 이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에 내려 145개의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종탑들이 나타난다.
Rivershide Church, NYC
1930년 당시 4백만 달러의 건축비를 댔던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kefeller Jr.)의 어머니 로라 스펠만 록펠러(Laura Spelman Rockefeller, 1839-1915)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3층 종탑엔 74개의 크고 작은 청동종이 설치되어 있다. 지름 122인치(3.1m), 4만 파운드(20톤)에 달하는 종(부르동 벨, Bourdon Bell, 낮은 음을 낸다)을 비롯 자그마한 10파운드 종까지 총 50만 파운드(23만kg)에 달하는 종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타워 건축엔 강철빔이 사용됐다. 탑 자체는 파리 인근 13세기 고딕양식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 Cathedral)의 서쪽 타워에서 영감을 받았다.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 사진:위키백과/ 리버사이드교회의 부르동 벨
세계 최대규모의 카리용벨 소장처는 대전의 혜천대학교 78개와 미시간의 킥인더힐스(Kick in the Hills) 교회의 77개로 기록된다. 혜천대의 카리용은 네덜란드왕립종 제작소가 2002년 제작한 것이다. 한국의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Emile Bell, 771년, 국보 제 29호)의 비천상(飛天像)이 떠올랐다. 에밀레종은 제조에만 34년이 걸렸으며, 지름 2.27미터, 무게는 18.9톤에 달한다.
Rivershide Church, NYC
매 15분마다 종소리가 타워에서 8마일(13km)까지 울려퍼진다고 한다. 유리벽의 종탑 음악실(clavier cabin)에는 베틀 오르간처럼 생긴 악기 카리용(carillon)이 설치되어 있다. 종의 추와 철선으로 연결되어 레버와 페달로 연주하는 카리용은 중세에 사람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릴 뿐만 아니라 화재, 폭풍, 전쟁 등의 재난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무엘 바버, 에드워드 엘가, 존 케이지도 카리용 음악을 작곡했다. 마침 투어 시각에 카리용주자(Carillionneur) 찰스 세모위치(Charles Semowich)씨가 연주하는 모습과 함께 추가 타종하면서 아름다운 음을 내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었다.
*The Carillon At Riverside Church
허드슨강, 조지워싱턴브리지와 그랜트장군 묘가 내려다 보인다. Rivershide Church, NYC
종탑 위로 올라가면, 아치형 석회암 창문이 설치된 전망대에 다다른다. 360도 맨해튼, 허드슨강, 뉴저지의 전망이 펼쳐진다. 그랜드장군 묘와 멀리 조지 워싱턴 브리지 아래 빨간 등대도 보인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원월드트레이드센터, 톱 오브더 록과는 다른 스펙터클한 전망이다.
종탑 투어는 수-토요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15), 일요일 오후 2시 30분($20)에 열리며 1시간 진행된다. 운이 좋으면 종탑에서 카리용 콘서트도 감상할 수 있다.
Riverside Tower Tours
Riverside Church, NYC
리버사이드 교회는 1930년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가 총 4백만 달러를 들여 고딕리바이벌(프렌치 고딕) 양식으로 건축했다. 오리지널 건축회사 알렌&콜린스(Allen & Collens: 프란시스 R. 알렌과 찰스 콜린스) 팀은 프랑스로 가서 파리 인근 13세기 고딕 교회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을 주모델로 삼고, 스페인의 고딕양식 교회 디자인을 통합했다. 메인 건물 건축가 헨리 C. 펠턴은 교회 입구의 디테일, 벽의 스테인드글래스 창문(30개 이상), 각 포털의 조각, 종탑과 성단 바닥의 미로(Labyrinth)도 샤르트르의 중세 미로를 본따 설계했다. 네이브(성소)는 100피트 높이의 천장, 대리석 바닥에 석회암 벽으로 건축됐다.
J.D. 록펠러 주니어는 1932년 리버사이드 교회 옆의 황폐한 사쿠라 공원(Sakura Park) 개조를 위해 35만 달러를 들여 옴스테드 형제(센트럴파크, 리버사이드파크 조경가)를 고용해 보수했다. 1961년부터 15년간 교회 자체에서 라디오방송국 WRVR(106.7MHz FM)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2년 교회와 부속건물이 국가사적지로 등재됐다. 2014년 7대 담임목사로 에이미 K. 버틀러(Amy K. Butler)가 임명됐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1967년 베트남전 반대 연설(“Beyond Vietnam: A Time to Break Silence”) 등 5차례 방문했으며, 넬슨 만델라도 다녀갔다. 농구스타 카림 압둘 자바는 청소년 시절 이 교회에서 농구를 했다. 리버사이드 교회는 모든 종파에 열린 종교간 초교파적(interdenominational), 다문화, 사회정의 등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다. 예배당 수용인원은 2,100명이다.
Riverside Church
490 Riverside Dr.
New York, NY 10027
*무성영화 ‘팬텀 오브 오페라’ 오르간 상영회 Silent Film ‘Phantom of Opera”(1926)@Riverside Church
*버스터 키튼 무성영화 ‘장군’ 상영회 Silent Film “The General”(1929)@Riverside Church
*모닝사이드 하이츠, 리버사이드교회 인근 맛집: Bar 314, 2019
막힌 담을 헐라! (리버사이드 교회 소개) > 지난 오피니언
막힌 담을 헐라!뉴욕 리버사이드교회(the Riverside Church) 스케치(하영호 목사)한국교회에 리버사이드교회가 잘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이 놀랍다. TV 전도자 로버트 슐러, 크리스탈교회, 새들백교회 등은 의외로(?)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런 현상이 내게는기이하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리버사이드교회를 소개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능력도 없으나, 진솔하게 느낌을 전하려고 한다. 더 많은 정보는 홈페이지( www.theriversidechurchny.org )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나는 뉴욕을 서너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뉴욕의 다양한 색깔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할 때마다 바뀌는 느낌. 하지만 굳이 하나의 색을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라고 말할 것이다. 빛의 삼원색(빨강, 파랑, 초록)을 섞으면 흰색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색의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을 혼합하면 검은 색이 된다고 한다. 내 눈에 보이는 뉴욕은 감색혼합(減色混合)을 통한 짙은 회색의 도시이다. 가색혼합(加色混合)을 통한 환한 백색을 띄지 못한 아픔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산업화 200년의 역사가 섞이고, 어렵지 않게 미추(美醜)의 궤적을 훑어볼 수 있다.뉴욕, 더 정확히 만하탄은 현대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국제금융의 핵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9/11 테러’의 상흔을 남겼다. 점잖게 말해서 경제, ‘돈’은 자본주의의 핵심 언어다. 만하탄의 월가(the Wall Street)에는 악명 높은(?) 황소상이 길거리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힘과 돈의 결합체인 현대문명의 우상(偶像)이다. 최첨단 산업은 전자정보기술(IT)도 생명공학기술(BT)도 아닌 금융이다. 20세기 산업화의 황태자였던 일본이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앞선 기술력을 지녔음에도 뒤뚱거린 것은 낙후된 금융시장 때문이었다. 우리가 IMF 위기를 겪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가장 밑바닥에 깔린 기조다. 은 비웃음꺼리에 지나지 않는다.만하탄의 다운타운에 월가(街)가 있다면, 미드타운에는 센트럴파크가 있고, 리버사이드교회가 있다. 센트럴파크가 육체의 쉼터요, 활력소를 일깨우는 초록 공간이라면, 리버사이드교회는 미국의 정신적 기둥이다. 단순히 기독교의 상징만은 아니다.이 교회의 설립정신은 세 단어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교파의 교류(interdenominational), 인종의 교류(interracial), 국가의 교류(international)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상호(相互, inter)라는 접두어다. 교파주의의 극복이나, 인종차별의 철폐 등으로 새겨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반인종주의(anti-racism)가 아니라 인종의 교류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는 의 정신이다. 정반합(正反合)도 아니고, 갈등하고 대립되어 있는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승화된 내일을 열자는 정신(信仰)의 결정체다.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지역적 특성을 볼 필요가 있다. 만하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소위 말하는 다운타운은 빌딩 숲으로 우거진 부유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교회가 자리 잡은 곳으로부터 북쪽은 다운타운과 대비되는 흑인 빈민 거주지역인 할렘이 시작된다. 아프리카계, 스페인계(말이 스페인계지 남미 출신) 빈민지역이다. 리버사이드교회는 장로교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컬럼비아대학, 유니온신학교, 유대교신학교,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더불어 서있다. 이 지역은 미국 기독교의 상징적 신학자이자, 미국의 상징적 지성인인 라인홀드 니버를 기념하는 거리로 명명되어있기도 하다.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상징들을 보자. 강변 쪽에서 보면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서문(西門)이 있는데, 의미를 지닌 부조(浮彫)가 문을 감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가슴에 안고 있는 장면이다. 얼핏 카톨릭교회 같은 웅장한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나, 그 입구에 새겨진 조형물은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역시 오래된 교회의 전통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이미지일 것이다.반대편 동문(東門)이 주출입구인데 놀랍게도 핵(核)물질 표시가 있다. 핵물질 대피소 표시다. 내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현대문명의 아픔을 보여준다. 종교집회시설이기에 굳이 대피소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교회가 이 세상의 피난처라는 신학적 상징을 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종교적 상징들로 채워져야 할 입구에 낯선 표시를 부착한 소중한 뜻이 마음에 남는다.교회의 내부에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를 기리는 사진이 걸려 있고 (1959년 12월에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본관 남쪽에 이어져 봉헌되었었다.), 할렘을 그려놓은 그림, 잘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림 등이 눈에 띈다. 이 역시 진보와 보수, 과거와 현재, 고전과 모더니즘이 공존하며 숨쉬는 상징일 것이다. 지역과 교회의 안팎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의 상징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예배에 대한 느낌을 전하기 전에 역사를 거칠게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회의 뿌리는 1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포크스트리트 침례교회가 모체였다. 1848년에는 영국 감리교 출신으로 침례교로 전향한 토마스 아미티지 목사가 부임하였고, 1860년에는 미드타운에 5번가 침례교회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 1889년에는 진보적 성향을 지닌 윌리암 화운스목사(담임목사 사임 후 브라운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부임하였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뉴요커들이 모이게 되었다. 1901년에 부임한 루푸스 존스턴 목사는 침례교회 목회자였으나, 침례가 더 이상 회중들의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7년에 부임한 찰스 에이크드 목사는 서로 다른 교파적 배경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이 흐름은 후임목사들에게도 이어져 간다.1925년에 부임한 해리 포스딕 목사시기에 이르러 교회에는 중요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열린 신앙과 근본주의의 문제였다. 이 과정을 거치며 현대적이고 초교파적 성향이 강화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미루어졌던 새 교회건물 건축도 방향을 잡아간다. 1927년에 지금의 리버사이드 지역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1929년에 교회사무실을 열었고, 여름에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여름방학을 갖는다. 가을부터 놀랍게도 유대교 회당(Temple Beth El)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30년에 드디어 완공된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 성전건축에는 미국의 거부 록펠러 2세의 절대적 공헌이 있었다.2차대전이 끝나고 로버트 맥크라켄이 설교목사로 부임하였고, 그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 반전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59년에는 앞서 언급한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봉헌되었다. 1960년에는 파블로 코토목사가 히스패닉 사역자로 부임하였다. 1989년에는 지금의 제임스 포브스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리버사이드교회는 침례교를 모태로 출범하였으나,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고,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전통을 존중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의 아픔을 나누는 정신을 지니면서도, 록펠러 2세의 헌금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등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인종과 소수 민족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끌어안기 위해 애쓰고 있다.이 정신은 한국교회,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는 극심한 국론 분열로 인해 혼란을 겪는 듯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남북분단, 이어진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고난의 상처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간주되었던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과제가 충돌하였다. 4.19, 5.16, 10.26, 12.12, 5.18 … 지금은 이 과정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사회가 숨 고루기를 하고 있다. 이제 모든 분야, 부문에서 자신의 목소리만을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집단이 자신의 눈(時角)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마음 놓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까닭에 상대방을 받아들일 정신적인 여유, 관용이 사라진 것이다.교회는 이 갈등과 긴장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도록 하는 큰 소명을 지니고 있다. 리버사이드교회는 이 흐름, 신앙고백 위에 서서 예배를 드린다. 어느 한 편을 정죄하고, 다른 한편에 서지 않는다. 상호관용(inter)의 자리에 선다. 미국은 우리보다도 더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다민족국가다. 흑백 갈등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이나 뉴욕을 떠받들고 있는 하부조직을 이룬다. 그들을 보듬어 안으며, 백인들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해간다. 지금의 담임목사는 검은 피부를 지녔다. 여성 목사, 백인 목사가 함께 도우며 교역에 전념한다. 하나가 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이질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그래서 예배는 역설적으로 더 장엄하고, 경건하고, 축제적이다. 마치 카톨릭 미사를 연상시키는 의식의 상징성, 절제된 언어. 모든 이들을 위한 폭넓은 기도, 아름다운 찬양, 그리고 다이나믹한 설교, 이 메시지는 철저하게 성서적이다. 어느 교회보다도 더 정통적인(orthodox) 분위기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받아들인 회중들이 세상으로 나간다.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회중석을 지나 출입구에서 축도한다. 세상에 파송하는 상징을 지닌 것이다. 모이는 교회, 고백하는 교회, 말씀을 듣는 교회, 봉헌하는 교회, 세상에 나가는 교회의 상징성이 잘 조화돼 있다.굳이 말하자면, 예배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진보적인 분위기의 프로그램은 주중 활동으로 전개된다. 일례로 한 한국인 선교사가 인디언으로 불리는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을 위해 원주민 언어 웅변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는데 재정지원을 요청했더니, 서류심사만으로 5,000불을 선뜻 지원해주었고, 앞으로도 추가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와서 놀랐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교회가 편지 한 통으로 재정지원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가난한 이들도 정성껏 차려입고 가족의 손을 잡고 나오기에 겉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중에 교회에 나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의 모습을 엿보면, 중산층과 가난한 이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2,400명이라는 결코 작지 않는 교회. 신앙과 지성의 균형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는 교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교회. 잠자는 신앙심을 일깨우는 예배. 우리에게도 이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http://www.mago37.co.kr/(마산 고등학교 37회)의 2402(송세진)에서 펌
리버사이드교회(RKS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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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Religiosus :: 뉴욕 리버사이드교회 이야기
어느 햇살 맑은 일요일 아침, 한 컬럼비아대 학생이 브로드웨이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마침, 허드슨 강변 언덕 위 “‘록펠러교회’의 높다랗고, 회색의, 값비싼 탑의 커다란 종”이 성스러운 시간 오전 열한 시를 알려줍니다. 하지만, 종소리를 들은 청년은 그 교회 대신 “작은 벽돌 건물”의 코퍼스 크리스티 성당으로 들어가 미사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영세를 받고 카톨릭 신자가 되지요. 그가 바로 이십 세기 최고의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입니다. 그리고 한때 사회주의 청년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던 머튼이 부정적 어감으로 묘사한 ‘록펠러교회’는 미국의 진보적 그리스도교를 대표해온 리버사이드교회입니다. 만약 머튼이 거북할 정도의 웅장한 외형 대신 그 안에서 불지펴지고 있던 예언자적 정신을 보고 리버사이드교회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면 오늘날 개신교 영성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록펠러 주니어와 포스딕: 기이한 만남?
리버사이드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 당대의 갑부였던 존 D. 록펠러 주니어와 자유주의자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 목사의 만남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만남이 리버사이드교회의 정신과 실천의 틀을 주조했으니까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1920년대는 19세기 말부터 시작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충돌이 여전히 교회적,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지하고 있던 포스딕은 소속 장로교단으로부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든지 시무하던 퍼스트 프레스비테리안 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 목사직을 사임함으로써 자기 신념을 지켰지요. 마침, 미국 교회의 얼키고 설킨 교파주의와 전근대적 신학에 신물이 나 있던 록펠러 주니어는 새시대에 맞는 교회일치 운동을 일으키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반-교파주의, 반-근본주의로 이름을 얻은 포스딕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두 사람의 만남은 제갈량을 얻기 위한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연상시킵니다. 록펠러 주니어가 포스딕에게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파크 애버뉴 뱁티스트 교회로 와 달라고 하자, 포스딕은 침례를 받아야만 정교인 자격을 주는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며 거절합니다. 록펠러 주니어는 세례제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합의를 끌어낸 후 포스딕을 다시 찾아가지만, 이번엔 부유한 동네에서 부자들만을 위해 목회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합니다. 록펠러 주니어가 그럼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새로운 교회를 지어주겠다고 하지만, 포스딕은 여전히 요지부동입니다. 이유를 묻는 록펠러 주니어에게 포스딕이 말합니다. “당신은 너무 부자니까요. 난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이의 목사로 알려지고 싶지 않습니다.” 록펠러 주니어가 말합니다. “솔직해서 좋군요. 하지만 그거 압니까? 내 부 때문에 당신을 비판할 사람들보다 당신의 신학 때문에 나를 비판할 사람이 더 많을 거라는 거?” 이 말에 포스딕은 마음을 바꿔 리버사이드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록펠러 주니어는 냉혹한 자본가로 비난 받았던 아버지 록펠러와 달리 자본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며 ‘복지 자본주의’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자선사업을 통해 미국의 교육, 문화, 종교 등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를 최선의 체제로 신봉한 점에서 다른 자본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본주의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포스딕과 자주 언쟁을 벌인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록펠러 주니어는 최대후원자로서의 위치를 이용하여 포스딕과 리버사이드교회의 정치적 선택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 10월 5일, 리버사이드교회의 입당예배에 일부러 참석하지 않은 것도 교회에 어떠한 형태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리버사이드교회에 그가 1959년 죽기 직전까지 계속 기부한 총액은 당시 돈으로 천문학적 액수인 약 3천 2백만불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록펠러 주니어와 포스딕이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이였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딕이 1926년에 [대담한 종교]라는 책을 냈을 때, 당대의 진보적 그리스도교를 사상적으로 대표하고 있던 라인홀드 니버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포스딕의 종교는 중산계급의 것일 뿐, 그다지 ‘대담하지’ 않다. 그는 현대 문명의 근본적 비도덕성, 비도덕적 민족주의, 권력에의 욕망, 그리고 탐욕에 대해 도전하지 않는다.” 니버가 맞다면, 록펠러 주니어와 포스딕의 만남이 꼭 ‘기이한’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자본의 사회적 책임성을 실현하는 정도에 대한 기대만 달랐을 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지 않은 데서는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전근대주의적, 근본주의적 종교를 거부한 데서는 입장이 일치했고요. 따라서, 리버사이드교회는 록펠러 주니어와 포스딕이 각각 대표하고 있던 ‘좋은 자본주의’와 ‘좋은 종교’의 자유주의적 이상이 만난 자리에서 생겨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머튼이 리버사이드교회를 ‘록펠러교회,’ 즉 부자들의 교회로 본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리버사이더들은 고학력, 고수입의 중산층 내지 중상층에 속하니까요. 지난 2000년에 실시한 교회 내 설문조사 응답자의 약 5분이 1이 박사학위 소지자였고, 교인들의 평균소득은 5만불에서 7만 5천불 사이였습니다. 소득 2만불 아래를 빈곤층으로 분류하는 미국에서 리버사이드교회를 중산층 교회로 보는 건 사실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리버사이더들이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마다 큰 목소리로 사회정의를 외치며 참여해온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진 자들의 교회이면서도 적당히 윤리적인 척 해온 역사일까요, 아니면 태생적 한계 속에서도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해 온 역사일까요?
사회정의를 위한 헌신의 역사
리버사이드교회 남쪽으로 붙어 있는 8층 높이의 거대한 부속 건물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 첫 글자들을 딴 MLK 빌딩입니다. 리버사이더들이 킹 목사의 삶과 뜻을 얼마나 깊이 기리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한 표지이지요. 지금도 리버사이더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역사적 순간은, 1967년 4월 4일, 킹 목사가 리버사이드교회에서 “베트남을 넘어: 침묵을 깨야 할 때”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악을 폭로했던 날입니다. 당시 니버조차 민주주의를 위한 ‘개입’의 필요성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상황에서, 킹 목사의 메시지는 충격적이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킹 목사가 옳았음을 증명했지요. 이후 리버사이드교회는 민권운동에서 반전평화운동으로 사회참여의 지평을 넓힙니다.
1977년부터 십여 년 동안 교회를 이끈 윌리엄 슬로언 코핀 목사는 리버사이드교회의 사회적 실천을 국제적 차원으로 넓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0년대 초, 리버사이더들은 비핵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1982년 6월 12일에는 유엔과 함께 비핵화 촉구 시위를 주도적으로 조직했고, 이 날, 사백여 명의 교인들이 리버사이드교회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벌였습니다.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설교자로 초청된 문동환 목사가 학살자들과 미국의 연루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리버사이더들의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4일, 킹 목사의 반전연설 42주년을 기념해 월스트리트에서 열린 “은행이 아닌 민중을 지원하라!”는 구호를 내 건 대규모 시위에도 교회 차원에서 대거 참여했지요.
한편, 인종차별, 성차별, 전쟁을 반대하는 노력에 비해 가난 해결을 위한 노력은 다소 부족했다는 안팎의 비판도 있습니다. 물론 1995년 제임스 포브 목사가 가난의 문제에 교회적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 것은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직접 리버사이드교회를 방문해 정책토론에 참여했을 정도로 반향이 컸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급식소, 중고품 가게, 미용사 교육, 이민자 무료 영어교육 등도 꾸준히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들이 자선활동을 넘어 근본적 가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못합니다. 물론, 일개 교회에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서는 안 되겠지만, 포브 목사가 제시했던 가난 극복의 전국적, 국제적 비전을 고려하면, 그것을 구체화하는 교회적 노력이 조금 미진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버사이드교회는 미국 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예언자적 교회로 존재해왔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교회 이름을 건 선언들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헌신해온 리버사이더들 하나하나의 삶입니다. 어느 날, 옆에 앉은 개일이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라크에 자원병으로 가 있었거든요. 마침 그날은 반전 시위에 리버사이더들이 참여하기로 한 날이라 그의 마음이 불편하겠다 싶어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마자, 그는 반전문구가 인쇄된 티셔츠로 갈아 입고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엄마들은 전쟁을 반대해” 라고 말하면서요. 자기 자식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어머니들이 있기에 리버사이드교회는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예언자적 교회일 겁니다.
흑과 백을 넘어 무지개 공동체로
매월 첫 주일에는 전통적 양식의 성만찬을 나눕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건 성만찬 빵이 흰 빵과 갈색 빵 두 가지로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밝은 피부색을 지닌 이들만의 몸이 아니라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이들의 몸이기도 하다는 걸 상징하는 걸까요? 하지만 아직 백인 중심의 교회였던 초기의 리버사이드교회는 인종차별은 아니었지만 인종적 편견으로부터까지는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포스딕 조차 인종차별을 비도덕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문명사적으로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흑인들을 우스갯거리로 삼는 농담을 설교와 연설 중에 즐겨 사용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2대 로버트 제임스 맥크라켄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흑인들이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지요. 인종차별에 대한 리버사이드교회의 당시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69년 5월 4일, 급진적 흑인 민권운동가 제임스 포먼이 갑자기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 백인들의 교회는 흑인들의 희생에 대해 배상하라는 취지의 [블랙 매니페스토]를 낭독합니다. 리버사이드교회 외에도 여러 백인교회와 단체들이 그 대상이 되었지요. 이때, 포먼 그룹의 ‘난입’을 비난하기에 급급했던 대부분의 교회들과 달리, 리버사이드교회는 그 선언의 취지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배상의 차원에서 특별히 조성한 약 30만불의 기금으로 “사회정의를 위한 리버사이드 재단”을 구성했습니다.
사실, 포먼이 1960년대의 리버사이드교회를 다른 백인교회들과 동일시한 것은 조금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 두 해 전인 1967년에 흑인 목사인 칼 플레미스터가 리버사이드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한 해 전인 1968년에는, “권위에 대해 따져보자!”라는 모토의 교회민주화를 통해 흑인들을 교회 지도력 구조에 더 많이 포함시켰으니까요. 이런 흑-백 조화의 노력은 포브 목사 이후에는 제도적 차원을 넘어 의례와 신앙생활로까지 확장됩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아무튼, 제도, 예전, 생활 모두에서 흑인 교인들의 비중과 역할은 더 이상 ‘배려된 주변’이 아니라 실제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인적 비율만 보더라도 2007년 현재 리버사이더들의 60 내지 70퍼센트가 흑인들입니다.
리버사이드교회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동성애자 교인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일찌감치 1978년에 동성애자들의 모임인 마라나타회를 교회의 공식적 조직으로 인정한 덕분이지요. 물론 내부적 갈등도 있었습니다. 1985년, 부목사였던 채닝 필립스가 동성애는 죄라는 취지의 설교를 합니다. 이때, 유니온 신학교 학생이던 휘트 허친슨이 설교 직후 일어나 필립스 목사의 입장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교인들은 송영 때 단상 한 쪽에 모일 것을 제안합니다. 이에 필립스 목사의 동료인 조앤 카바노 목사를 비롯 일부 교인들이 동조하지요. 이 사건 후 공동체는 동성애에 대한 심층토론을 전개했고, 마침내 네 주 후인 6월 2일, “동성애자들에 대한 개방, 포용, 인정의 선언” 문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매년 6월 마지막 일요일에 맨해튼에서 “게이 프라이드 행진”이 개최됩니다. 이날 아침 리버사이더들은 마라나타회 주관으로 동성애자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예배 후 오후에는 교회 차원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에 참여하지요. 이년 전, 마라나타 아침식사 때 제가 앉은 테이블에서 저 빼고는 모두 동성애자들이었습니다. 성적소수자로서 차별 받아 온 아픔이 있는 이들이라 그런지, 그 테이블에서 ‘성적소수자’인 제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주었지요. 그날 설교자였던 이벳 플런더 감독의 물음이 기억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 몸은 여성의 몸이기도 하고, 흑인의 몸이기도 하고, 장애인의 몸이기도 하고, 또한 동성애자의 몸이기도 합니다. 잔치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초대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초대받은 자와 초대받지 못한 자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 잔치를 기념하는 성만찬에 이제는 흰 빵, 갈색 빵 만이 아니라 ‘무지개떡’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뜨겁고, 따뜻하고, 자유로운 영성
자유주의 교회들의 영적 온도는 차갑습니다.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나오는 지적 신앙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유주의 교회의 하나인 리버사이드교회의 영적 온도는 가끔 차가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뜨겁거나 따뜻합니다. 역동적 흑인영성이 지적이고 정적인 자유주의적 영성과 잘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저녁의 “은혜의 자리”는 “사회적 실천을 위한 영성”을 추구하는 포브 목사가 1998년에 시작한 예배입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드리는 이 예배는 흑인영성 특유의 감성적 찬양, 춤, 간증, 치유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흑인들이지만 뜨거운 영성을 추구하는 백인들도 꽤 참여합니다. 어려서 너무 뜨거운 영성에 데인 상처가 있는 제게는 조금 어색하고 불편한 예배지만, 개인주의로 파편화된 뉴요커들이 서로의 고통과 행복에 “지저스!” 혹은 “할렐루야!”로 화답하며 영적 가족을 이루는 걸 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게다가 이 예배의 “덜 위압적인 스타일”은 가난한 사람들도 위화감 없이 참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의 문을 넓히는 데도 기여하고 있고요.
한편, 뜨겁진 않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온도의 영성도 다양하게 추구되고 있습니다. 매 주일 이른 아침, 크라이스트 채플에서의 “아침명상”이 그 중 하나입니다. 침묵, 기도, 성만찬, 성서 읽기, 설교, 치유의 독립적 예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명상에는 아늑하고 친밀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주로 참여합니다. 이 명상의 가장 아름다운 순서 중 하나는 아픈 이에게 모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하는 치유의례입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자매, 형제의 아픔을 덜고 생기를 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영적, 신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미로(labyrinth)명상, 향심기도 등 조용하고 깊은 영성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리버사이드교회의 영성을 온도의 은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자유로움의 영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리버사이드교회에서 운영하는 [전인건강센터]는 불교 선 수행과 요가 등 동양 종교들의 전통적 수행법은 물론, 심지어 뉴에이지 영성 테크닉까지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센터가 직접 후원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의 제목만 소개하면 “마인드풀니스 명상과 수련회,” “소리 치유,” “기공,” “하타 요가” 등입니다. 자유롭게 열린 정신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들이지요.
자유로운 영성의 바람은 공동체의 예배 속으로도 붑니다. 2001년 9/11 참사 바로 다음 주일, 리버사이더들은 두 무슬림 지도자와 랍비 한 명, 그리고 불교 승려 한 명을 초청하여 “미국을 치유하는” 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무슬림이 “알라후 아크바르(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십니다)”로 시작하는 아잔을 맑고 깊은 목소리로 낭송함으로써 예배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한 초청 설교자가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받는다고 설교한 것 때문에 한 주 동안 교회가 들썩거렸습니다. 결국, 그 다음 주일, 담임목사 브래드 브랙스턴은 그 초청 설교자의 신학적 입장이 리버사이드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라는 걸 발표하는 특별 순서를 가졌습니다. 배타주의에 대해서만은 배타적인 리버사이더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리버사이드교회 서쪽 정문 위에는 과학자, 철학자,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제도적 그리스도교와 불편한 관계였던 찰스 다윈, 앨버트 아인쉬타인, 랠프 왈도 에머슨 같은 이들의 조각상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공자, 붓다, 무함마드의 조각상을 보는 것은 짜릿한 일입니다. 그것도 80여년 전에 세워진 교회 건물에서 말이지요. 리버사이드교회의 [사명 선언문]은 교회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성격을 “초교파(interdenominational),” “다인종(interracial),” “다국적(international)” 세 형용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성의 바람이 공동체의 더 깊은 곳으로 불어, 언젠가 “종교간(interfaith)”이라는 형용사를 추가할 날도 오게 될까요?
리버사이더 되기
리버사이드교회에 출석한지 반 년 정도 되었을 때, 정식 등록교인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공부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공동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교인등록 절차가 간단할 거라는 예상도 했고요. 그런데, 제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교인등록 신청 후 며칠 뒤, 토요일 오전 아홉 시부터 네 시까지 있을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설마 시간을 다 채워 끝내랴 싶었는데, 교회 소개, 친교, 토론 등을 포함한 일정은 정확히 네 시에 끝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 다섯 명의 새 교우들과 기존교우 십여 명이 종일토록 함께 한 오리엔테이션 ‘첫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다양성의 천사들”을 팀 이름으로 정한 우리는 그 후 두 달 간 교회의 각종 모임과 집회에 초대받았고, 특히 구체적 활동 한 가지를 정해 ‘완수’해야 하는 임무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생필품 및 식품을 마련해 전달하는 활동을 했지요. 공부 때문에 모임에 몇 번 빠지면서, 이러다 ‘탈락’되는 거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동료 ‘천사들’과 오리엔테이션 자원봉사자 교우들이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두 달 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며 새교우 교육을 마친 우리는 주일 예배 때 공동체에 소개 되었고, 예배 후 환영 파티에서 ‘레드 카펫’위에 일렬로 서서 교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새교우 오리엔테이션의 경험은 공동체가 기대하는 평신도상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수동적으로 지도자들을 따라가지 말고, 공동체의 능동적 주체가 되라는 것이지요.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리버사이드교회 안에는 평신도 중심의 다양한 위원회들이 존재합니다. 매주 예배 후에는 1층 교제 공간에서 각종 위원회들이 테이블을 놓고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활동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며 참여를 촉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바이블 스터디’ 등과 같은 신앙과 신학교육도 평신도들이 직접 기획하고 주도합니다.
리버사이드교회 새 목사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은 코핀 목사는 자신의 약점으로 교회행정 경험의 부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청빙위원회 사람들이 말합니다. “걱정 마세요. 목사님은 행정을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 운영의 모든 영역에서 교인들의 자주적 참여와 지도력이 실현되고 있다 보니, 담임목사는 공동체의 사상적, 영적 방향을 정립하는 데 전력할 수 있습니다. 포브 목사가 리버사이드교회 목사의 역할을 “동기부여자” 또는 “제안자”로 정의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그 내용을 식별하고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교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지만요.
도전: ‘완전’으로 돌아갈 용기
리버사이드 교회는 성인(聖人)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규모도 크고 목소리도 다양하다 보니 내부적 갈등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심지어 법적 소송으로까지 가는 경우도 가끔 있고요. 1995년에 포브 목사의 비-자유주의적 목회 스타일에 반발한 이들이 큰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최근엔 새로 부임한 브랙스턴 목사의 60만불 연봉에 대한 일부 교인들의 비판이 경제위기 현실과 맞물려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리버사이드교회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차이들’을 수용하는 다양성의 문화에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가 ‘지적,’ ‘영적,’ ‘윤리적’ 차원 모두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다른 성향의 리버사이더들이 한 지붕 아래 더불어 지낼 수 있고요.
하지만 다양성의 문화가 아직 충분히 수용하고 있지 못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경제적 차이입니다. 한 리버사이더로서 공동체를 바라 볼 때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고 있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렌스 하미야는 “주일에 입을 옷 (Sunday Clothes)”이 없어 교회에 오지 못했다는 한 가난한 흑인 여성과의 대화를 소개하며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리버사이드교회의 부와 그 구성원들의 고학력, 고수입은 가난한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걸 두려워하게 하는 계급장벽을 높여왔습니다.” 물론 의도적 배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차이들’은 나서서 수용하면서도 경제적 차이만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현실은 그만큼 공동체의 품이 좁다는 걸 말해줍니다. 당연히 뼈아픈 자기비판도 많았지요. 포브 목사가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결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영속적 가난에 처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을 이념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그 이념을 자양분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체제의 수혜자로 살아왔습니다.
네, 이유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명확해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는 리버사이드교회만의 과제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교회가 직면하고 해결해가야 할 과제입니다. 고난의 땅에서 탄생한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뉴욕의 풍요로운 환경에서 연구하고 있는 제 자신의 실존적 과제이기도 하고요. 리버사이드교회에서의 경험은 저를 근원적 물음과 마주하게 합니다. “나는 가난해질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 수 있을까? 완전해질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복음서 19:26)”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고개 숙여 기도할 수밖에요. 그 답을 당장 살아낼 용기까지는 아니어도 그 물음과 함께 살아갈 용기를 달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여행이 시작한 곳에서 실현되었던 ‘완전’으로 돌아갈 용기를 달라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그대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십시오 (마태복음서, 19:23).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6).
참고한 책들과 웹사이트
Dorrien, Gary. The Making of American Liberal Theology: Idealism, Realism, and Modernity, 1900-1950.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Hudnut-Beumler, James. The Riverside Church in the City of New York: A Brief History of its Founding, Leadership and Finances. New York, N.Y.: Riverside Church, 1990.
Paris, Peter J., et alia. The History of the Riverside Church in the City of New York. New York, N.Y.: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4.
The Riverside Church in the City of New York http://www.theriversidechurchny.org
새길이야기, 2009년 여름호
키워드에 대한 정보 리버 사이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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